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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삶의 뿌리를 짓눌러온 그날의 수치…“지금도 성폭력은 ‘네 잘못’이라고 하는데” 정현순의 증언 [플랫]

행복한 0 3 05.15 16:16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②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44년 만에 말하는 이유언니와 민주화운동 지원 활동하다 생일이던 날 새벽, 계엄군에 연행강렬한 죽음의 공포와 성적 수치심 기억하기 싫어서 마음 속 깊이 묻어5·18에 끄달려와 7년마다 인생을 바꿔 43년만에 당당해진 것 같은 느낌성폭력 대한 사회적 낙인 없어지길
1980년 5월 27일은 정현순씨(69)의 음력 생일이었다. 엄마는 전날 정씨에게 전화를 걸어 생일이니까 내일은 꼭 집에 오라고 했다. 정씨는 집에 가지 못했다. 그날 새벽 전남도청에서 들리는 총격 소리를 들었고 새벽 4~5시쯤 녹두서점에서 연행됐기 때문이다. 텅빈 금남로를 걸어서 서석병원 옥상에 이동했던 ‘죽으러 가는 길’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병원 아래로 내려갔을 때 지프차가 있었고 군인 1명이 정씨를 조수석 뒷자리에 밀어넣었다. 기습적 강제추행을 당한 건 그 순간이었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가슴을 가리자 손등에 곤봉 세례가 이어졌다.
정씨는 당시 26세였다. 1남4녀 중 셋째였던 정씨는 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전력 정직원으로 일하며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언니와 형부가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감옥에 다녀오는 것을 지켜봤고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나이였다. 서울 본사에서 일하다 광주 지점으로 옮겨 1년쯤 지난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5월 18일부터 10일간 언니와 함께 녹두서점에서 계엄군에 맞서 광주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시장에서 천을 떼어 와 검은 리본을 만들고 상황이 궁금해 서점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는 그땐 무섭고 공포스러웠지만 내일에 대한 기약 없이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2021년까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 없었던 것처럼 살아왔지만 없었던 것은 될 수 없었던 사실이다. 그는 연행 당시 성폭력과 연행 이후 상황들은 그를 평생 강력하게 끌어 나쁜 선택을 하게 했던, 고통 속에 살게 했던 원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씨를 전북 완주 자택에서 지난 7일 만났다.
연행 후 계엄군은 두 손을 깍지 껴서 머리 뒤에 올리게 한 뒤 걷게 했다. 40여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공포심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혼자서 죽으러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행 후엔 시청 당직실에서 몸수색을 한다며 상의와 하의 옷 솔기를 샅샅이 만져가며 수색했다. 수치심을 느꼈지만 더 끔찍했던 것은 상무대로 이동해 영창 앞 운동장 모래밭에 꿇어앉아 끌려온 사람들이 구타당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경찰서 조사 과정에서는 보안과 형사들이 수시로 기합을 줬고 심한 성적 모욕적 발언들을 지속했다. ‘여성의 성기를 썰어 버린다’는 둥 평생 듣지 못한 말들이었다. 정씨는 발음만으로도 수치스럽지 않나. 사람이 이런 말도 하는구나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의 조사대상 사건 중 ‘광주재진입작전과 연행·구금·조사 과정’ 중 발생한 성폭력 사건은 총 6건이다. 이중 5명은 강간과 강제추행 피해 외에도 연행 후 신문과정과 구금시설에서 지속적인 성적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강간 피해자가 아닌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사건 후 ‘맞고 도망가고 숨는 꿈’을 반복해서 꾸며 오래 후유증을 앓았지만 자신의 피해를 ‘작은 것’으로 달래온 사람의 질문이었다. 그는 2시간 이상 이어진 인터뷰 내내 자신의 경험을 꺼내놓을 때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는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그는 44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상황 속으로 들어가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조사위 조사를 받을 때도, 지난달 28일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처음 만난 간담회날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다시 똑같이 경험이 되면서 눈물이 났다.
그는 간담회에 ‘5·18과 자신’을 설명하는 것을 가져오자는 조사위의 제안에 5·18 당시 연행되던 사진을 가져왔다. 몇년 전 줄을 서서 연행되는 사람들 영상 속에 자신이 있다며 언니가 전해준 사진이었다. ‘미국 방송’의 것이라는데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영상 보니까 같이 잡혀가고 있던데 그때는 혼자 잡혀간다고 생각했어요. 금남로 거리에 나만 뒷짐 지고 걸어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강제추행을 당할 때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감쌌던 손에는 곤봉이 날아왔다. 유치장에 들어갔을 땐 손등의 핏줄이 터져 부어올랐다. 이제 손등 상처는 잘 보이지 않게 됐다. 그러나 강제추행의 트라우마는 심연에서 그의 삶을 움직였다. 그는 숨겨진 창고 속 수치심은 내 삶을 좌지우지 했다고 했다. 화가 나면 화를 충분히 낼 때 자유로워져요. 모든 것이 재경험이 잘 되어야 사라지죠. 연행 당시 두려움은 증언 기회도 있었고 다시 경험이 됐지만 수치심은 창고 속에 넣어 숨겨 놨으니까 다시 경험이 안 되는 거예요. 두려워서 꺼내지 않았으니 계속해서 내 삶을 좌지우지했겠죠.
2019년 언니는 그에게 <녹두서점과 오월>이라는 책을 함께 쓰자고 했지만 그는 쓰지 않았다. 1980년 5월 당시 함께 있었던 언니에게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개인의 기억, 수치라고 생각했고 언니한테, 가족에게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누구도 몰랐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저 아래다 감춰버렸으니까요. 나는 광주를 기억하기 싫어 완주에 왔고 담을 쌓고 지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기억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싶더라고요.
정씨의 언니는 정현애 오월어머니집 전 이사장이다. 언니는 조사위 조사에서 동생이 자신과 형부 등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피해를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연행 당시 언니는 동생의 손등이 빨갛게 부어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돼 말을 걸었다가 진압봉으로 머리를 세게 맞아 두개골에 상처가 생겼다. 언니는 40여년이 지나서야 동생 상처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정현애씨는 민주화운동에 관여해오지 않았던 동생이 5·18 이후 왜 결혼도 하지 않고 여성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고,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센터장의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동생의 피해 사실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왜 그러한 선택을 해왔는지 이해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2021년 정씨는 가족들이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할 때 처음 자신의 피해를 진술서에 적었다. 이후 조사위에 41년 만에 신청사건을 접수했다. 생각해봤어요. 왜 지금에야 말하게 됐을까. 그동안 말하지 못한 건 그만큼 무게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기억하기조차 싫었던 섬찟한 경험이 내 삶의 근간을 흔들어왔기 때문에요.
정씨는 자신의 인생을 7년여마다 바꿔왔다며 무의식 속에 박혀 버린 삶을 끊임없이 바꾸려고 해왔다고 표현했다. 그는 1980년 7월 훈방된 후 한전에 돌아가 일하다 그해 12월 그만뒀다. 집안의 생계가 자신에게 달려 있었지만 정신적 불안 등으로 다니기 힘든 상태가 됐다. 1981년부터 신학 공부를 했다. 공부를 마치고 사회복지단체에서 2년간 일했고 빈민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해 7년간 목회 활동을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했다. 이후 영성수련을 하다 1997년 결혼하면서 완주로 내려왔고 아이를 7년간 키우다 전주 전북여성인권센터 쉼터장으로 또 7년간 일했다. 지금은 완주에서 소를 키우며 지내고 있다.
그는 5·18 경험은 인간으로서 가치를 상실했던 ‘사람이 아닌 존재’로 전락했던 밑바닥까지 갔던 경험이라며 삶의 뿌리에는 해결하기 힘든 것이 있어서 계속 찾아다녔지 않나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수치스러운 경험이 제대로 정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꿈틀꿈틀해왔고 어떤 상황이 되면 ‘이건 뭣 때문에 힘들어 못 하겠다’고 합리화하면서 그만뒀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는 5·18 기억에 끄달려 왔던 삶이라며 ‘끄달려왔다’는 표현을 수 번 썼다. 그는 평생교육원 심리상담 한 학기 과정을 수료하고 다양한 수련 프로그램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마음이 불안하니까 훈련을 많이 했어요. 제 뿌리에 해결하기 힘든 게 있어서 찾아다녔지 않나 싶어요. 무의식 속에서 나를 지배했던, 나를 잘 못 살게 하는 뿌리요.
그는 완주 산골짜기로 온 이유에 대해서도 광주를 피하고 싶어서 이사온 것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완주에서 26년째 살고 있다. 그는 또다른 한편 삶을 축소시켜오며 지냈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목회자를 계속 했으면 더 잘 나갔을 텐데 시골로 들어갔고 시골로 들어가서 인권센터를 계속 다녔으면 또 달랐을텐데 소 키우러 들어가고요. 자꾸 삶을 축소한 것 같아요.
그는 마흔세 살에 결혼했다. 그는 80년에 꽃 같은 스물여섯 살밖에 안됐는데 나는 시집을 못 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며 사실 내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삶을 안 살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결혼이란 개인적 삶의 욕심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가 있었고 성추행을 당했죠. 살아있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존재였으니 삶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거였어요. 사회적 삶을 살고자 하는 내부 동기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정씨는 스스로 ‘5·18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정씨는 2005년부터 7년간 전주 전북여성인권센터 쉼터장으로 일하며 탈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하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그는 자신을 조사하러 왔던 5·18 조사위 조사관들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여러 번 얘기했다. 자신이 탈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할 때 그랬기 때문이다. 상담할 땐 피해 여성이 겪은 트라우마를 함께 경험할 수밖에 없다. 약을 먹거나 술을 먹고 자살 시도하는 여성들을 구조요청하는 업무를 하기도 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일을 그 여성들의 경험을 통해 듣게 돼 힘들 때도 많았다. 쉼터장으로 일할 때 완주에서 전주로 출퇴근하며 지냈지만 사실 24시간 대기 상태였다.
그때 ‘5·18 경험’이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주의 상담’에 대해서 배웠고 치유회복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내 삶을 재해석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다며 피해자의식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말했다. 그 시간이 가부장적 통념에서 ‘탈통념화 과정’을 거칠 수 있던 시간이었다. 5·18 경험에서 내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면 민주화운동의 ‘주체자’가 아니게 되잖아요.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해 이날 죽더라도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해서 밥도 하고 시장 가서 검은 천 떼고 리본도 만들었어요.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 더 이상 억울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최근 전두환이 12·12 당시 어떻게 권력을 탈취했는지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그는 멀리 있던 ‘독재자 전두환’이 내 삶을 바꾼 근본 원인이었구나. 내가 전두환 때문에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좀더 빨리 진상규명됐다면 어땠을까. 그는 국가가 5·18 관련자들에게 보상한다고 하고 그때의 진상을 규명한다고 할 때 성폭력 사실도 넣었으면 삶의 무게를 이렇게 무겁게 안 살았겠지요라고 했다. 1990년 ‘5·18 보상법’이 통과되면서 정부는 5·18 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해왔지만 성폭력 피해 조사는 2020년 ‘5·18 진상규명법’이 통과되면서 처음 본격화됐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보상 신청도 올해 8차 보상신청에 처음 포함됐다.
지난해 12월 정씨는 조사위로부터 진상규명 결정이 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국가의 인정을 받으니까 한숨이 푹 쉬어졌고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삶의 무게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분들이 원하는 건 잘못했다는 인정, 그리고 사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과 아들은 그거 안고 오느라 힘들었겠다고 위로했다. 가족들에게도 얘기하고 나니 당당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달 28일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만난 날에는 ‘풀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씨는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니 다들 아팠구나 공감하게 됐고 힘이 생겼다. 꽁꽁 감추고픈 기억에서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자신에게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탈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면서 늘 그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내 기억에 대해서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안 해줬더라고요. 늘 대상화시칸 거죠.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니 밖으로 드러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피해자들은 카톡방을 만들고 자조모임 이름을 ‘열매’라고 정했다. 그는 열심히 목소리 내는 분들 보니 함께 일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아직 아무렇지 않다며 의식까지 해방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나가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생각해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잘못된 관념은 오래도록 피해자들이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조사받을 때 피해 당시 지프차 구조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오래돼서 주위 상황이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며 그 차에 사돈도 피 흘리고 있었다는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타당한 건 사람들이 ‘아 그랬구나’ 인정해주잖아요. 지금도 성폭력은 ‘네 잘못’이라고 하는 시선이 많은데 40년 입 다물다가 그런 시선 받으려고 말할 리가 없지 않겠어요.
그는 그럼에도 국가는 맨날 그랬으니까 억울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정씨는 성폭력 범죄는 나의 증언 밖에 없다는 게 힘든데 오랜 시간 지난 후에 이야기했다고 누가 믿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며 이의제기해도 어떻게 증명시켜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만약 ‘진상규명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해도 더이상 억울해할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아요. 국가의 진상규명 없이 살아보려고 내가 40년을 버텼어요. 그 40년을 인정 안 했다고 답답해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삶은 내 스스로 만들어가니까요.
또 그는 ‘국가의 진상규명 결정’이 전부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5·18 경험을 40여년이나 말을 못하고 있었던 것은 사회 시선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라며 성폭력 피해가 ‘낙인’이 되는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잘못된 시선은 인간이 인간에게 씌운 낙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낳고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예요. 한 번 당하면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데 ‘피해’가 개인의 책임이라 바라보는 잘못된 관념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이예요.
그는 5월이 되면 두드러기 증상을 앓아 왔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다.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게 최고라고 하잖아요. 과거의 미련과 미래의 불안에 대한 걱정 없이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누리는 삶요. 5·18 기억에 끄달려서 사느라 ‘지금 여기’를 못 살았던 게 가장 큰 불행이죠. 삶의 단추가 제대로 꿰어지지 않아서 지금을 살지 못했는데 지금을 사는 게 큰 목표예요.
▼ 임아영 젠더데스크 겸 플랫 팀장 layknt@khan.kr
서울 한낮 기온이 24도에 오른 14일 오후 1시30분. 여의도 국회 본관 계단 앞에는 가로 5m, 세로 5m의 하얀 몽골 텐트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채 해병 특검 관철을 위한 더불어민주당 초선 당선인 비상행동’이란 현수막이 내걸린 텐트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서미화 당선인(비례)을 비롯한 초선 당선인들과 3선의 박주민 의원 등 낯익은 얼굴도 보였습니다.
민주당 22대 초선 당선인들은 지난 10일 같은 자리에서 비상행동 선포식을 열고 천막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조국혁신당 당선인들이 지난 13일 농성장을 지지 방문하는 등 범야권 원외 투쟁의 장이 된 모습입니다.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특검 거부권을 행사할 때를 대비해 범국민 대회 등 장외투쟁 연대 방안을 고심 중입니다.
이번 천막 농성은 최근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된 윤종군 당선인(경기 안성)이 주도했습니다. 윤 당선인은 통화에서 중앙당에서 당직자로 오래 일을 해온 경험을 토대로 개원 전 초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천막 농성을 제안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개인 자격으로 제안했고, 직접 텔레그램 대화방을 만들어 참가자를 모집했다며 박찬대 원내대표에게는 사전에 말씀만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천막 농성은 주말을 제외한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뤄진다고 합니다. 71명의 초선 당선인 중 60여명이 참여해 하루 약 10명씩 돌아가며 자리를 지킵니다. 윤 당선인은 천막 농성의 효과에 대해 초선들의 결기를 보여주는, 유권자들이 준 표심을 국회 중앙 정치 무대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천막 농성은 야당의 역사 깊은 대정부 투쟁 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0년 12월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4대강 예산·날치기 법안 무효화를 주장하며 서울광장에서 100시간 천막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3년 8월엔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서울광장에서 국가정보원 개혁을 요구하며 노숙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두 시기 모두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각각 173석, 154석으로 원내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때였습니다. 보수 언론은 민주당의 천막 농성을 길거리 야당의 고질병이라고 칭하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도 야당 시절 천막 농성을 한 바 있습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2019년 11월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연동형 비례대표제 철회를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단식 노숙 농성을 했습니다. 단식 투쟁은 황 대표가 단식 8일 만에 의식을 잃고 병원에 이송되며 끝이 났습니다. 당시 집권 여당이던 민주당은 128석, 자유한국당은 114석으로 의석수는 14석 차이가 났습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농성장이 국회 안팎에서 생겨나고 사라지길 반복했습니다. 다만 민주당 초선 당선인들의 이번 천막 농성은 앞선 사례들과 다르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민주당은 지난 4·10 총선에서 압승해 22대 국회에서 175석의 초거대 야당이 됩니다. 원내 제1당의 초선 당선인들이 개원도 전에 ‘나인 투 식스(9 to 6)’ 출퇴근 농성을 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국민의힘은 당장 완력 과시라며 반발했습니다. 호준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지난 11일 논평을 내고 22대 국회가 아직 개원도 하지 않았는데 천막부터 치고 완력을 과시하는 구태의연한 행태부터 보여서야 하겠나라며 민주당은 거대 의석의 원내 다수당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민주당 초선 당선인들을 향해선 나쁜 선동부터 배울 것이 아니라 진짜 정치를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당대회 미뤄지면 한동훈에게 유리할까
이철규, 정말 윤심 맞나? 아닌가? 당내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긴가민가’
국회 법사위원장·운영위원장 배분의 역사···다수당 우선이냐 균형이냐
내로남불 행태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단식농성을 할 당시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변인(현 원내대표)은 농성장에서 당직자들이 4명씩 하루 2교대 하는 것을 지적하며 보여주기식 ‘단식투쟁’을 중단하고 ‘민생논의’에 집중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9월 돌입한 단식 농성 역시 민생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원내 제1당 대표의 검찰 소환조사 대비용 ‘방탄 단식’이란 비난에 직면한 바 있습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일부 자성 목소리가 감지됐습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본인들이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냐면서도 천막 농성이나 단식 투쟁은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한다. 원내 제1당의 투쟁 방식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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