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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차 한 잔에 담긴 건 덖는 정성 만이 아니죠···”

행복한 0 9 05.01 15:30
봄이 깊어지는 이맘때 전통 차(茶)를 덖는다. 커피가 일상화되고 마실거리가 넘쳐나지만 까다롭고 힘든 수제 덖음차는 여전히 만들어진다. 이 땅에 차가 들어온게 삼국시대인 7세기니 1400여 년에 이른다. 긴 세월 동안 해마다 차나무 새순으로 차를 만드는 일(제다)은 계속됐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부침을 겪었지만 면면히 이어질 만한 가치가 있어서다.
차는 물질적 효용성을 넘어 문화예술을 부흥시키는 정신적 매개체이기도 했다. 많은 다시(茶詩)가 읊어지고, 다화(茶畵)가 그려졌으며, 수준 높은 다기(茶器)가 빚어졌다. 개인적 삶의 성찰과 수양을 돕고, 사회적 교류와 소통을 이끌어 풍성하고도 고유한 차문화를 일궈냈다. ‘제다’가 보존하고 가꿔야 할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현대인들은 여전히 차를 찾고, 그래서 제다인들은 오늘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양한 차가 만들어지는 남도땅 전남 순천시 주암면 모후산 자락을 지난 26일 찾았다.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71)이 40여년 째 ‘동춘차’를 만드는 곳이다. 한학자인 박 소장은 조선 후기 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선사(1786~1866)의 다맥(茶脈)을 이어오고 있다. 해남 대흥사 주지를 역임하며 초의선사의 명저들을 지키고 그 차를 연구한 응송스님(1893~1990)이 차 스승이다.
‘동춘차’의 찻잎은 야생 차밭에서 나온다. 주암호를 끼고 있는 청정한 산속, 대나무가 함께 자라는 산비탈이다. 해마다 4~5월이면 연구소 제자들, 후원자, 남녀노소 각계 인사들이 기꺼이 그를 찾아 산으로 들어온다. 동춘차의 제다 현장은 차문화를, 문화예술을, 세상사를 이야기하는 사랑방·카페·살롱이 된다. ‘초의차’라 할 수있는 동춘차는 비매품이다. 후원자를 중심으로 나눠지면서 스님들, 차를 즐기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겐 알음알음 유명하다.
‘동춘차’같은 제다 작업은 힘든 노동, 섬세하기까지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해야하는 일이다. 쌀 한톨을 얻기 위해 농부의 보살핌이 88번에 이른다지만 한 잔의 차에도 만만치 않은 정성이 필요하다. 독특한 맛과 향·색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더욱이 박 소장은 ‘차의 기운’까지 중요시한다. 차를 마셨을 때 몸에 생기가 돌고 살아나는 듯한 그런 기운이다.
‘동춘차’의 찻잎은 가장 어린 새순 두 잎을 따는 것으로 시작된다. 박 소장은 기후변화로 큰 걱정을 했는데, 청정한 산속이어서인지 다행히 찻잎이 좋다고 했다. 따온 찻잎들은 불순물 제거 등을 거쳐 한 숨쉬며 안정화된다. 그 사이 차를 덖는 무쇠솥이 달궈진다. 화상은 막으면서 솥 온도를 감지하기 위해 박 소장은 맨손에 손가락 마다 모시천을 두른다. 대나무 잔가지로 만든 특별한 솔도 준비한다. 제다 때는 불 조절이 워낙 중요해 땔감은 민감한 불 조절이 가능한 대나무 조각들이다.
박 소장과 호흡을 맞추며 불을 맡은 이는 특별하다. 이명균 도예가(57)다. 불을 다루는데 있어 도예가를 넘어설 전문가가 있을까. 경기 여주에서 전통적 장작가마 ‘하빈요’를 운영하며 주목받은 이 작가는 최근엔 전남 고흥군 점암면으로 옮겨와 다양한 도자 작업을 하고 있다. 박 소장과 이 작가의 인연은 다기로 시작됐다. 차와 더불어 다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박 소장은 차문화가 최고 수준에 이른 고려 청자 다기에 버금가는 다기, ‘동춘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다기를 구하던 중 이 작가와 2011년 만났다.
이후 이들은 하빈요에서 수많은 청자 다기를 실험·연구했다. 빚고 굽고 깨부수고 빚기를 10여년 반복했다. 제다인으로서 도예가로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다기에 이를 때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최근 거의 다 됐다고 의견을 모았다. 빙렬이 없는 순청자의 비색이 감도는 찻잔, 주전자 등이다. 이들의 협업은 토크쇼가 열릴 만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 2018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전시장에서는 박 소장의 고려 차문화 연구내용과 이 작가의 청자 다기가 선보여 눈길을 잡았다. 당시 박 소장은 고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고려시대의 차(단차)를 재현했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각계 인사들이 모인 다회가 열리기도 했다.
제다는 찻잎들을 무쇠솥에 넣으며 본격 이뤄진다. 다양한 온도의 불 조절 속에 찻잎을 재빠르면서도 골고루 섞고 뒹굴린다. 찻잎들의 변화를 감지하며 진행되는 초벌 덖음은 수분을 없애고 특유의 맛과 향을 농축시키는 작업이다.
초벌 덖음을 한 찻잎은 상하지 않을 적절한 수준으로 비빈다. 차 성분이 잘 우러나오고 찻잎을 부드럽게 하는 과정이다. 다시 바람을 쐬며 안정화 시간을 보낸 찻잎들은 초벌보다 낮은 온도에서 재벌 덖음이 이뤄진다.
재벌 과정에서 찻잎은 연녹색에서 점차 흑갈색 가깝게 변하고, 맛과 향을 오롯이 품어낸다. 초벌 덖음 때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향을 내뿜던 찻잎들은 이때 쯤이면 수박향 같은 독특한 향이 솥 주변으로까지 퍼져나간다.
재벌 덖음된 찻잎은 따뜻한 온돌방으로 옮겨진다. 맛과 향이 무르익고, 기운이 강건해지는 숙성과정을 거치면 마침내 맑고 시원하며 기운이 쨍쨍해지는 동춘차가 완성된다. 해마다 보통 400~600통이 만들어진다.
동춘차는 두 차례만 덖는다, 우려내는 것도 70~80도의 물이 아니라 90~95도 안팎의 비교적 뜨거운 물이다. 박 소장은 두번 이상의 덖음은 본래의 맛과 향을 오히려 줄이거나 없앤다고 생각한다. 아홉번 덖는다는 ‘구증구포’가 유명하지만 ‘구’는 아홉이라는 숫자라기보다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물 온도는 질 낮은 차를 어설프게 우려내다보니 떫은 맛을 가리기위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본다. 또 차문화의 내용보다 외형적 격식을 강조하는 다례도 일본식 다례의 영향이라 권하지 않는다.
사실 제다는 무형문화재임에도 제다법 등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들이 난무하는게 현실이다. 조선시대 들어 차문화가 침체됐고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여러모로 왜곡되면서 다맥, 제다법 등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해서다.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다는 자긍심을 가지면서도 일부 제다인들은 저마다 ‘내 주장이 옳고, 내가 정통’이라는 식이다. 이에따라 박 소장은 차 관련 고문헌과 현대 제다의 전면적인 현장 전수조사, 이를 바탕으로 한 비교·연구를 통해 한국 전통 차문화에 대한 학술적 정리가 시급하다고 본다.
박 소장이 한국 차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인 초의선사와 조선 후기 차 관련 유물 169건 364점을 2021년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한 것도 그런 이유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올해 초 박 소장의 기증 유물을 1차 조사한 성과물인 ‘박동춘 기증 초의선사 유묵 번역집 1-가련유사’를 발간했다.
여러 주장들에 대해 박 소장은 저는 그저 묵묵히 차를 만들 생각그동안 해온 것처럼 국내외 옛 문헌을 발굴·연구하며 차문화의 학술적·이론적 틀을 세우는 작업을 할 생각이란다. ‘동춘차’ 제다에 참여한 이학종 작가(전 미디어붓다 대표)는 박 소장도 어설픈 근거의 주장들은 전문가로서 반박하고 싶지만 그 보다는 좋은 차를 만들고 또 공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며 차계 사람들 저마다 상대를 부정하기 보다 자신의 차를 보다 잘 만드기 위해 공부하고 애쓰는데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소장도 저마다 최고 수준의 좋은 차를 만드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좋은 차는 본래 야생 찻잎에 더해 마실 때 경쾌하고 시원한 맛과 향기는 물론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고, 뒷맛은 달고 정갈하며 그윽한 것이라 믿고 그렇게 차를 만들고 있다. 일본·중국 차에서는 느끼기 힘든 것이다.
그는 이왕이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만한 높은 수준의 차가 만들어지고 또 모두가 즐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좋은 차의 경험이야 말로 차문화 활성화의 단초이자 한 잔의 차에 깃든 성찰과 소통·수양 같은 전통 차문화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까지도 되새겨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 소장이 이맘때마다 ‘동춘차’를 만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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